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읽어냅니다. 하나님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으로 상징되는 혼돈과 허무와 악의 세계를 통제하고는 계시지만 이와 동시에 그들의 존재를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짐승들은, 말하자면, 세상 우주가 혼돈으로부터 생겨났던 바로 그 혼돈의 잔존물들이다. 자신의 부당한 고통 때문에 욥은 실존을 혼돈, 즉 본래 있었던 무질서가 계속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당신의 힘이 이와 같은 혼돈의 세력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욥에게 보여주시려고 애쓰는 동시에 이러한 세력들이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이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방금 말씀하셨던 사악한 자들을 대변한다. 또한 이들은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세력들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욥 자신이 그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다고 느껴왔던 바, 이러한 원초적인 혼돈의 잔여물들을 즉각적으로 끝장내시지는 않지만 이들을 통제하시고는 있다. 이 세상 안에 악은 있지만 세상이 악인 것은 아니다. 우주 내부에 혼돈의 세력들이 있지만 우주가 혼돈인 것은 아니다." 결국 악과 고통의 존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로 설명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악과 고통을 제어하고 계시지만 동시에 허용도 하신다는 것이지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깨우치시려는 의도도 분명히 하나님은 이 혼돈과 허무와 악을 상징하는 두 짐승의 세계를 손안에 넣고 계시지만.. 그들의 존재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인간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맞서거나 다스릴 수 없듯이 악과 고통은 인간이 파악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연악이나 도덕악이나 여하한 종류의 악이나 고통도 다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로 이 세상 안에 허용을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적 파악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우리 모두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고통관을 버리고 신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주권적 자유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입니다.